제주의 푸른밤 Start
살다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소소한 행동에 감동하고 오래오래 그 이미지로 누군가를 기억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게 M은 그런 친구다.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학창시절을 즐기고 있던 말괄량이 친구는 어느날 갑자기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됐다. 미리 예견되어있지 않았고 부모님 동행없이 가게 되었던지라 직장인 오빠와 함께 하는 낯선 학교 생활이 당황스럽고 슬펐다고 한다. 그때는 펜팔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방법이 없었던때라(구석기 얘기같다. ㅎㅎㅎ) 우리는 몇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집에 가는 길에 있던 시냇물 속에 커다란 나뭇잎이 맥만 남은채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너무 신기해서 친구에게 보내준 적도 있었다. 나의 오빠가 카츄샤였을때여서 노란종이에 파란색 줄이 있는 노트가 주로 쓰는 편지지였는데 친구는 그 편지와 나뭇잎이 너무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 편지를 얼마나 주고 받았는지 언제 끝이 났는지 사실 기억에 없다. 시골 아이같지 않게 하얀 얼굴과 유난히 밝은 머리색, 그리고 말괄량이처럼 장난스럽게 웃던 M의 미소는 가끔 생각이 났었다.
10여년 전에 미국에 살다 돌아왔다며 카톡을 보냈을때도 그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반가웠다. 예전에 보내주었던 나의 편지가 슬펐던 자신을 무척 위로했었던 기억에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내가 해야하는 미션에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붓고 있었어서 매우 바쁜척을 했던거 같다. 그 때문인지 M은 내가 자기를 썩 반가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 했고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우리는 아주 가끔 톡을 주고 받다가 드디어 만났다.
약간의 잔주름과 나이가 주는 차분함을 장착하고 어색하게 만났지만 아주 금방 너무 많은 속내를 공유하게 됐다. 그러다가 연말 중학교 동창모임이 있었고 제주에서 M이 가끔 만났다던 O라는 동창도 같이 만나게 됐다.
너무 오래 미션클리어에만 집중하고 살았어서 이젠 주변도 친구도 돌아보며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M에게 그런 제안을 했나보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제주 여행하는 모임을 만들까?" 하필 제주도 여행을 하자고 한 이유는 M이 제주도에서 문화 해설사로 일하고 있어서였다. 언제나 제주에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말하던 M이었던지라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오래 다른 환경에서 살아 온 친구들이 어느날 얼굴 한 번 봤다고 마음이 통하긴 쉽지 않을것 같았다. M과 나는 특히 사람에게 까다롭다. 그러다 보니 섣불리 친구를 불러모으기보다 우리끼리 해보자라는 의견이 나왔고 첫 멤버는 M, O, Na 이렇게 셋이 되었다. 모임 이름은 '제주의 푸른밤' 이번 여행은 우리의 첫 여행이다.
퇴근하고 김포 출발해서 제주에는 저녁 8시 30분쯤 도착하고, M의 집에서 준비된 저녁을 먹으며 얘길 하다보니 새벽 세시가 되어 취침했다. 여유있게 자고 일어나서 이른 점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20코스에 있는 김녕해수욕장 주변으로 걷기로 해서 그 인근에서 친구가 몇 번 지인들에게 검증받은 식당을 정했는데 맛이 최고다. 유명해지면 안되는데~ 그래서 상호 말고 자세한 정보는 안줄거다. (ㅎㅎㅎㅎㅎ 이 심뽀 오또카지)
근처 마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걷는다. M은 문화관광 해설사 일을 해서인지 소소하게 도움되는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엄청 든든한 친구^^. 날은 화창한데 바람이 무섭다. 9m/s 전후였는데 아직은 봄이 아니어서 체감 온도가 낮다. 그래도 제주도이데~ 하면서 패딩은 패쓰했는데 살짝 후회된다. 도로를 걸어서 올레길 진입로를 향해 가는 길에서 본 바다가 너무 예쁘다. 나 제주도다~~~~~~
제주 올레 20코스 김녕 해수욕장-성세기 태역길
우리의 목표가 올레길을 하나씩 걸어보자였지만 날이 춥고 바람이 드세서 코스 완주는 어려울거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여유있게 산책하는 모드로 걷다가 상황봐서 철수하는걸 목표로 했다. 제주에는 하르방을 모시는 곳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서문하르방은 원래 파평 윤씨 일가에서 섬기던 수호신이었는데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마을 전체가 섬기게 됐다고 한다. 걷다보면 곳곳에 귀여운 동상이 있다. 세련된 문양의 구를 가지고 있어서 해녀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해녀캐릭터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걷다보면 마을을 지나게 된다. 초입에는 해녀 박물관도 보이지만 들어가진 않았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걸로~
청굴물은 용암대지의 하부에서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이다. 제주에는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이 많지만 청수동에 있는 청굴물의 용천수는 유난히 차갑고 효험이 좋아서 여름철에 찾아와 며칠씩 묵어가기도 한단다.
김녕 지오트레일에 구간에 도대불이라는게 있는데 예전에 등대역할을 하던 것으로 원래는 상자모양이었는데 1960년경 태풍으로 있해 허물어져서 원형으로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도대불을 보고 돌아서면 갑자기 'I LOVE Sea' 표지판과 함께 너무 아름다운 바다와 등대가 보이다. 이렇게 훅 들어오기 있기? 심장 관리 요망 구간이다. 매서운 바람을 잠시 잊고 부두에 한참을 앉아서 물멍을 했다. 햇살이 있을때와 없을 때 물빛이 다르고 부두를 사이에 두고 양 옆의 물빛도 완전히 다르다. 맥주 한캔 마셔줘야되는데 말이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술을 하지 않아서 너무 아쉽다. 여행은 낮술인데... 담엔 텀블러에 담아오리. 기필코. 흐흐흐
제주의 옛집, 예쁜 까페, 별장 같은 집, 담쟁이의 흔적이 가득한 돌 담, 벽이 도화지인 듯 작품도 참 많다. 더는 추워서 안되겠다 싶을 무렵 카페를 찾아서 한참을 쉬었다.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는 그저 황홀했다. 페이스츄리 붕어빵과 함께하는 아메리카노도 일품! 제주도 커피는 대체적으로 맛있다. 왜일까나?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그저 감사합니다~~~
한 시간여를 사진도 보고 수다를 떨며 쉬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해수욕장쯤 오니 사람들이 좀 보인다. 금요일 오후지만 아직은 제주여행 성수기는 아닌가보다. 우린 한가하니 더더더 좋다. 김녕 해수욕장의 모래는 엄청 하얗고 곱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소실되는 양이 많아서일까? 해변 모래위에 천을 덮어놓은게 특이했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을 걸으니 주머니에도 바람이 들어온다. 흑!
그런데 말입니다. 아니 무슨 바다색이 이렇게 예쁠까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카메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어서 그저 한동안 바라만 봤다.
우린 여기까지 걷고 돌아섰다. 해수욕장 맞은편에 있는 캠핑장을 눈독 들이며 날이 따뜻할 땐 여기서 캠핑을 하자고 다짐해 본다. 돌아오는길에 '우리들의 블루스'를 촬영했다던 곳을 더 걸어볼까 했지만 해가 지니 더 추워져 수산시장에서 광어와 문어만 사왔다.
처음으로 시도한 제주의 푸른밤 여정은 광어와 문어숙회를 메인 메뉴로 차려 숙소에서 편하게 먹으며 마무리 했다. 바람과 싸우느라 에너지 소진 모드! 그래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바다 빛깔에 저절로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간다.
다음 제주의 푸른밤을 기대하며
다음날 오후 다시 서울로 와야하는 일정이어서 아점과 커피로 아쉬움을 달랬다.
아점은 교래리에 있는 '오름가든'에서 꿩요리 코스를 먹었는데 어제 소진된 에너지를 원상복구해주는 느낌이었다.
꿩 뱃살 샤브샤브, 꿩다릿살 버터구이, 메밀전, 꿩 만두칼국수, 꿩죽으로 구성된 세트다. 한 번쯤 먹어보면 좋을 음식이다. 공항가는길에 M이 추천한 까페에 들렀다. 창 가득 바다가 보이는 카페다. 인테리어는 꽤나 빈티지 해서 편안한 느낌이다. 커피맛도 일품!
제주도 여행모임 만들자는 제안을 한 Na를 칭찬하고 여행을 기획하고 동선을 짜며 마음 충전해 준 M과 회랑 꿩고기로 신체 충전해 준 O에게 무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엔 어딜 걷지? 하는 말에 "너랑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라고 해주는 친구. 나 너무 행복한 사람인걸 확인하며~^^
오름가든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블로그 글이 있어 대표로 링크를 걸어둔다.
'여행지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빛 가을 여행지-은행나무길 BEST 5 (1) | 2023.11.02 |
---|---|
<명성산>가을은 억새지~ (1) | 2023.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