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크리에이티브 업계 1위로 군림해 온 기업이 자신의 성벽을 스스로 낮추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신선한 충격이다. 이번 어도비 맥스 2024를 지켜보며 디자이너로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신기능에 대한 환호를 넘어, 거인의 ‘영리한 생존 전략’에 대한 경외감에 가깝다.
구글, 챗GPT(OpenAI), 미드저니 등 AI 강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혼란 속에서, 어도비는 "우리가 AI도 1등이야"라고 우기는 대신 쿨하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너희 모델이 뛰어나? 좋아, 그럼 우리 툴 안에서 쓰게 해줄게."
이것은 패배 선언이 아니다. 창작자들이 겪는 '파편화된 작업 환경(여러 AI 툴을 왔다 갔다 하는 피로감)'의 고통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어도비를 대체 불가능한 '허브(Hub)'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플랫폼 선언이다.
어도비가 그린 큰 그림,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기억해야 할 핵심 변화들을 정리해본다.
1. 전략의 대전환: 성벽을 허물고 연결하다
어도비는 그동안 파이어플라이(Firefly) 중심의 폐쇄적인 생태계를 고집해 왔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그 기조를 뒤집었다. 핵심은 서드파티 AI 모델의 전면적인 수용이다.
변화의 핵심: 사용자가 진짜 원하는 건 특정 회사의 AI 모델이 아니라, '끊김 없는 작업 환경(Seamless Workflow)'이라는 걸 간파했다. 내가 쓰는 툴 안에서 바로 결과물을 보고 싶은 것.
오픈 생태계: 이제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와 웹 앱 내에서 OpenAI(Sora), Runway(Gen-3), Pika, Google(나노바나나 프로), Topaz Labs(업스케일링), 11Labs(음성 합성) 등 각 분야 최고의 외부 모델을 선택해 쓸 수 있다.
의미: 어도비는 '모델 공급자'에서 'AI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으로 정체성을 확장했다.
2. 파편화된 워크플로우의 통합
통합 전략을 선언하며 마치 직접적인 모델 경쟁에서 한발 물러난 듯 보였던 어도비는 실제로 놀라운 자체 기술들을 꾸준히 개발해 오고 있었다. 이번 어도비 맥스 ‘스닉스’ 세션에서 공개된 열 가지 혁신 기술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어도비가 어떤 방식으로 외부 모델과 통합하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 기술적 진보를 보여주는지 살펴보자.
통합 전략: 창작자의 워크플로우 중심으로: 어도비 CEO 산타누 나라엔은 "우리 모델만 써라"가 아니라, "최고의 모델을 다 모아뒀으니 여기서 요리해라"는 어도비의 철학을 설명했다. 이건 실무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락인(Lock-in) 효과를 노린다.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플럭스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나노바나로 편집한 뒤, 토파즈로 업스케일링하고, 영상은 구글의 베어드로, 사운드는 11랩스로 처리하는 식이다. 마지막 편집은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에서 하는 완전한 일체형 워크플로우.
3. 포토샵: AI의 상상력에 정밀함을 입히다
'섬세한 제어'하는 핵심 가치를 공고히 하면서 픽셀 단위의 정밀한 작업과 원본 비파괴 편집이 가능한, AI는 이 본질을 해치지 않고 '속도'와 '퀄리티'를 증폭시키는 도구로 배치됐다.




- 토파즈랩스(Topaz Labs) 업스케일: 이건 정말 신의 한 수다. 단순 확대가 아니라, 깨진 캡처 이미지를 '복원' 수준으로 살리는 기능이 기본 워크플로우에 들어왔다.
- 하모나이즈(Harmonize): 합성의 난관인 '이질감'을 AI가 잡는다. 배경의 조명, 색 온도, 명암비를 분석해 피사체를 자동으로 맞춘다. 디자이너는 결과물을 고르고 마스크 정리만 하면 된다.
- 제거 도구(Remove Tool)의 진화: 이제 단순히 사물을 지우는 것을 넘어, 지우고 싶은 방해 요소를 '알아서 찾아서(Distraction Removal)' 지워준다. 전선, 지나가는 행인 등을 한 번의 클릭으로 감지하고 삭제한다. 이는 반복 작업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 생성형 채우기: 이제 파이어플라이뿐 아니라 플럭스나 나노바나 같은 외부 모델을 포토샵에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모델별 특성을 살려 더 다양한 결과물을 얻고 이렇게 완성한 이미지는 포토샵 내에서 바로 비디오로 확장해 사용할 수도 있다. 영상 편집 중 오디오가 2초 부족해서 배경음악을 억지로 늘리거나, 영상 클립 길이가 모자라 컷을 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 클릭 한 번으로 AI가 앞뒤 영상을 분석해 화면과 앰비언트 사운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해준다.
4. 파이어플라이 이미지 모델 5: 사실적인 표현의 진화
외부 모델을 받아들였다고 자체 개발을 멈춘 건 아니다. 파이어플라이 5는 '사실성'과 '편집 용이성'에 집중했다. 이전 버전 대비 텍스트 이해도와 디테일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AI 특유의 '매끈하고 인위적인 느낌'이 줄고, 실제 사진 같은 라이팅과 질감 표현이 가능해졌다.

- 4M 해상도: 텍스트 투 이미지(Text-to-Image) 단계에서 바로 400만 화소급 고해상도 출력이 된다. 극도로 사실적인 질감 표현(피부, 모공, 헤어 디테일)이 실제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하다.
- 영역 편집: "선글라스 씌워줘" 같은 명령이 전체 이미지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단순한 프롬프트 입력으로 구조를 유지하며 특정 영역만 수정하는 능력은 타사 모델 대비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 파이어플라이 보드(Board): 창작의 새로운 허브.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브레인스토밍하고 시각화할 수 있는 무한 캔버스로,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파일뿐 아니라 레퍼런스 이미지, 영상 등 모든 리소스를 한 공간에서 기획하고 관리할 수 있다. 또한 AI 프리셋을 이용해 이미지 스타일을 즉시 바꾸거나, 다른 이미지를 참조해 새로운 스타일을 생성하고 그것을 팀 단위로 공유, 피드백 기능도 강화되어, 창의적인 협업을 실시간으로 도출할 수 있다. 또 다른 신기술인 ‘파이어플라이 비디오 에디터’는 이미지에서 비디오를 생성하고 간단한 컷 편집까지 웹상에서 바로 수행할 수 있는 도구이다. 영감부터 완성된 비디오까지, 창작의 전 과정을 통합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한 셈이다.
5. AI 어시스턴트와 자동화된 창작 시스템


- AI 어시스턴트: AI 어시스턴트는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의 창작 맥락과 의도를 이해하며 작업 전 과정을 함께하는 적극적 ‘조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어도비 익스프레스에서는 “여름 테마 초대장을 할로윈 스타일로 바꿔줘”라고 요청하면, AI가 타이포그래피, 색상, 그래픽 요소 모두를 자동으로 변경한다. 아직은 베타에서 서비스 되는 중이다.
포토샵 웹 버전에서는 “피사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밝기를 낮추고 채도는 올려줘” 같은 간단한 명령어만으로 마스크 생성과 레이어 조정, 효과 적용을 알아서 처리한다.
사용자가 "내 디자인에 대해 조언해줘" 라고 하면 AI가 대비, 정렬, 시선 흐름 등 디자인 원칙에 따른 피드백도 제공해, 디자이너가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 프로젝트 그래프: 프로젝트 그래프는 포토샵, 파이어플라이, 일러스트레이터 등 어도비 도구들과 외부 AI 모델을 ‘노드’ 형태로 연결해 창작 워크플로우를 자동화하는 비주얼 빌더다.
노드는 ‘이미지 생성’, ‘색보정’, ‘객체 합성’, ‘업스케일’ 등 각각 독립된 작업 단계이며, [생성] - [보정] - [합성] - [리사이징] 과정을 그래프로 만들어 ‘캡슐’ 기능을 통해 복잡한 노드를 간단한 UI로 묶는다. 이후 참조 이미지나 텍스트 등 입력만 바뀌면 전체 작업 과정이 자동으로 재실행되어 빠르게 다양한 결과물을 생성한다. 복잡한 노드 구조는 ‘캡슐’이라는 UI 묶음으로 단순화해 슬라이더나 버튼 같은 직관적 인터페이스만 남겨 다른 사용자와 공유도 가능하다. 이 또한 아직은 스닉스의 프로젝트로 개발중에 있다.
7. 스닉스(Sneaks): "2D를 넘어 공간을 조작하다"
어도비 맥스 스닉스 세션에서는 실험 단계의 기술 열 가지가 공개되었다. 연구 단계를 보여주는 스닉스의 공통 테마는 "이미지를 2D 픽셀이 아닌, 물리 정보(깊이, 조명)를 가진 3D 공간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 중 7가지는 아래와 같다.

- 프로젝트 턴테이블: 2D 벡터 이미지를 AI가 자동으로 3D처럼 회전시켜 다양한 각도에서 확인하고 편집할 수 있게 해준다. 원래 스타일은 유지하면서 각도를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기능이다.
- 라이트터치: 촬영 이후에도 사진이나 영상 속 조명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기술이다. 빛의 위치, 색상, 밝기 등을 바꿔 분위기를 완전히 달리할 수 있으며, 2D 이미지에 3D 조명 효과를 더하는 개념이다.
- 프로젝트 모션: 벡터 일러스트에 AI가 자동으로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준다. 키프레임 없이 간단한 조작으로 움직임과 상호작용을 구현할 수 있어 제작 시간과 노력이 크게 줄어든다.
- 프로젝트 클린 테이크: 촬영을 다시 하지 않고, 이미 찍힌 인터뷰·영상 속 음성을 나중에 마음껏 고칠 수 있다. 억양 수정, 단어 교체, 소음 제거, 감정 조정까지 가능한 차세대 오디오 편집기능이다. 편집자는 오디오 파형을 직접 만지는 대신, 거의 자막(트랜스크립트)을 고치듯 텍스트를 수정하거나 옵션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결과를 얻는다.
- 프로젝트 사운드 스테이저: 영상 장면을 AI가 분석해서 “이 장면에는 어떤 사운드가 필요할지”를 먼저 제안해 주는 도구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알람이 울리고, 가방을 싸고, 문을 나서는 영상이 있으면, 알람 소리·지퍼 소리·발소리·문 닫히는 소리 같은 효과음을 자동으로 깔아주는 식이다. 생성되는 사운드는 레이어 형태로 분리되어 있어서, 필요 없는 소리는 끄거나 교체하고, 더 강하게/더 약하게, 더 가까이/더 멀리 들리도록 조정할 수 있게 설계된다.
요약하면 "사운드 이펙트 라이브러리를 뒤지는 시간"을 줄이고, 효과음 디자인을 AI와 대화하듯 디렉팅하는 개념에 가깝다. - 프로젝트 뉴 뎁스: 여러 장의 2D 사진이나 이미지를 입력하면, 이를 하나의 3D 공간으로 재구성해서 “마치 3D 씬처럼 카메라를 돌려볼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다. 전통적인 포토그래메트리처럼 정교한 3D 모델링을 만드는 것보다는, 가우시안 스플랫 등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깊이 있는 3D 이미지 공간’을 구축하는 쪽에 가깝다. 이렇게 만들어진 3D 공간 안에서는 2D 툴(예: 포토샵의 올가미 선택, 색상 변경 등)을 그대로 쓰면서도, 앞뒤 관계·원근을 감안한 편집이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원래는 평면 이미지였던 것”을 입체 무대처럼 다루면서, 카메라 앵글을 바꾸고, 사물을 앞이나 뒤로 배치하는 식의 편집이 가능해지는 방향을 보여준다. - 프로젝트 씬 잇: 한 장짜리 제품 사진(예: 운동화, 샴푸 병, 가방 등)을 기반으로, 그 제품이 놓일 3D 씬 전체를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기술이다. 먼저 2D 제품 이미지를 3D 오브젝트처럼 재구성하고, 그다음 “어떤 분위기의 장면에 놓을지”(해변, 풀파티, 럭셔리 라운지 등)를 텍스트로 설명하면, 제품에 어울리는 배경·소품·조명·그림자를 갖춘 완성된 신을 생성해준다. 이후에는 원하는 구도(카메라 각도)를 바꾸거나, 소품 배치·색감을 수정하는 식으로 다양한 광고 이미지·썸네일을 빠르게 찍어낼 수 있는 사용성을 지향한다. 특히 커머스·광고 쪽에서 “상품 사진 몇 장만 있으면 수십 개의 배리에이션 컷을 자동 생산하는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8. 마무리
어도비는 기존의 성공신화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의 강력한 AI 모델을 흡수하면서도 자체 기술을 진화시키고 있다. 핵심은 ‘AI 중심의 경쟁’이 아니라 ‘창작 경험 중심의 혁신’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말이다.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것.
즉, 사용자가 더 쉽게, 더 정밀하게, 더 유기적으로 창작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것—그것이 어도비가 그리고 있는 미래이다.
디자이너로서 우리는 이제 "어떤 모델이 성능이 좋은가"를 비교하는 소모적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신 "이 강력한 파이프라인으로 내 아이디어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높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창작의 본질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어도비의 이번 선택, 정말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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